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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보리행론 [2013.11.17 08:07:40] 달라이라마

[입보리행론] 달라이라마 법문



① 위대한 수행자 샨티데바

 

입보리행론은 샨티데바(Shantideva, 적천寂天)스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샨티데바는 나가르주나(Nagarjura, 용수龍壽)의 계보를 이은, 인도 중관학파의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한 분이시며, 진정한 성현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논서로는 [집학론(대승집보살학론)]과 [입보리행론 Bodhicharyavatara ]이 있습니다.

[집학론]은 많은 경을 바탕으로 해서 지으셨지만 그분의 직접적인 가르침도 많이 담겨있습니다. [입보리행론]은 직접 경을 바탕으로 해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지만 행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입보리행론]과 [집학론]을 함께 배웁니다. 함께 배우면 좋습니다.


왜냐면 [집학론]에서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은 부분은 [입보리행론]에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논을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샨티데바께서는 두 논서를 지으신 것 같습니다.


‘마음을 내는 것’에는 크게 내는 것과 작게 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대승과 소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큰 마음을 내는 것’을 대승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보리심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승의 가르침에는 유식학파와 중관학파가 있는데, 이 [입보리행론]은 중관학파의 사상에 대해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식학파의 사상에 대해 언급도 하지만 중관학파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더 자세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중관학파의 사상은 나가르주나로부터 전해진 하나의 계보입니다. 중관학파는 붓다빨리타(Buddhapalita, 불호佛號)에게로 전해져 중관학파의 견해를 아주 세밀하게 말하는 쪽과 바비베카(Baviveka, 청변淸辯)로 전해져 중관학파의 견해를 덜 세밀하게 말하는 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샨티데바께서는 중관학파의 사상을 말씀하실 때 붓다빨리타와 챤드라키르티(Chandrakirti, 월칭月稱)로 이어지는 귀류논증파의 입장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② [입보리행론]에 대하여  

[입보리행론]은 샨타데바께서 7세기경에 지으신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의 뜻은 ‘보살행에 들어가다’입니다. 보리심을 주제로 한 논 가운데 이보다 더 뛰어난 논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인도에서는 이 [입보리행론]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논에 대한 주석서도 많습니다.

티베트에서도 이 논이 번역된 이후, 쌰가파Sakya. 까규파Kagyu. 닝마파Ninama 등 모든 종파에서 이 논을 배우고 연구했으며 또한 많은 주석서를 펴냈습니다. 은혜로운 부처님께서 오셔서 법을 설하신지 약 25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입보리행론]은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이후 보리심에 대한 가르침을 가장 자세하고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이 [입보리행론]은 보리심에 관한 논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논서로 꼽히고 있습니다.


티베트어로 번역된 대장경은 약 100여 쀄디(티베트에서 경전을 묶는 단위) 정도 되는데, [입보리행론]의 근간이 되는 경은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에서는 보리심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중심 내용 즉 핵심은 보리심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논으로는 나가르주나께서 지은 논서 가운데 [고귀한 화환(보만론寶?論, Ratnavali, 한역은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을 들 수 있습니다. [고귀한 화환]에는 ‘나와 남을 평등하게 바꾸기’에 대한 방법이 실려 있습니다. 샨티데바께서도 [입보리행론]에서 ‘나와 남을 평등하게 바꾸기’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입보리행론]은 경과 논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 구성을 미리 보면,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제2장 죄업 참회품, 제3장 보리심 전지품,

        이 세 장은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한 내용입니다.

제4장 보리심 불방일품, 제5장 정지품(호계품), 제6장 인욕품은

        보리심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며 항상 지니기 위한 내용입니다.

제7장 정진품, 제8장 선정품, 제9장 지혜품은

        보리심을 더욱 증장시키기 위한 장입니다.


③ [입보리행론]의 전승 계보

제14대 달라이라마인 저에게 [입보리행론]이 전해진 계보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입보리행론]을 쿠누 라마이신 텐진 겔친(Khunnu Lama Tenzin Gyaltsen, 1885~1977)으로부터 처음 들었습니다. 텐진 겔첸께서는 캄지방의 족첸 수행자(자 빠툴 린포체Patrul Rinpoche) 가운데 한 분으로부터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분으로부터 [입보리행론]을 전해들은 것은 1976년도 인도의 보드가야에서입니다. 그 후 조금씩조금씩 [입보리행론]을 혼자 공부를 했습니다. [입보리행론]의 내용은 제 수행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티베트 모든 종파의 많은 스승과 스님들은, 예외없이 [입보리행론]을 암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다 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입보리행론]이 한국 불자들께서 새롭게 접하는 논일 것입니다. 이 논은 여러분의 신심과 수행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매번 법문을 할 때, ‘부처님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설명합니다. 제 경우, 4살 때부터 “스승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법에 귀의합니다!


승보에 귀의합니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라싸로 가서 일곱 살 때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인 승려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봅니다. 그때 제가 진정 삼보에 귀의를 했던가?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법에 귀의합니다! 승보에 귀의합니다!” 말로만 했을 뿐이지, 어떤 분을 부처님이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부처란 그저 ‘어딘가에 계시는 분’ 정도로 여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경전의 내용을 익히면서 ‘부처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또 ‘부처님께서 오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한 보리심과 공성(空性)에 대해 깊이 성찰을 한 후, 부처님은 여느 사람과는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에 대한 큰 신심이 생겼습니다. 이 신심은 어렸을 때 가졌던 신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하고 말합니다. 또 부처님은 아주 소중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런 신심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우리 티베트 사람 대부분은 불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처님은 소중한 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랍니다. 그래서 다들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관습이나 환경에 의해 생기는 이런 신심은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이런 방식-관습과 환경-에 의해 신심을 냅니다.


그러다 점차 보리심과 공성에 대해 알아가면서 ‘부처님’이라는 분이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리심과 공성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에서 비롯되는, 타당한 근거와 이유가 뒷받침 되는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신심이야말로 법에 대한 올바른 신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법의 계보

티베트에서는 전통적으로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법상에 오른 이가 어떤 경로로, 누구를 통하여 법을 전해 받았는지 ‘법의 계보’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께서도 [입보리행론]을 배운 스승을 먼저 밝히는 것이다.


④ 진정한 믿음, 바로 알아야 생긴다

귀경게를 독송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이 부처님 법인가?” 하고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티베트. 중국 그리고 한국은 오래 전부터 불교를 믿어온 나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불자이기 때문에 자신도 불자가 되곤 합니다. 그리고는 “삼보에 귀의합니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진정한 귀의를 하고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붓다. 달마. 상가에 귀의합니다.”하고 암송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말로만 하는 귀의일 뿐입니다. 귀의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드뭅니다. 이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심은 참으로 힘들 때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참으로 힘들 때,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신심입니다. 평소에는 “붓다. 달마. 상가에 귀의합니다.”를 하다가 힘든 상황에 처하면 ‘붓다’도 잊어버리고 ‘달마’도 잊어버리고 ‘상가’도 잊어버립니다. 이런 신심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됩니다. 붓다와 달마, 상가를 쉽게 잊어버리는 이유는 붓다. 달마. 상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역시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 달마. 상가가 무엇인지, 먼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⑤ 바른 실상을 아는 분, 부처님

부처님의 법이란 대략 2500년 전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수반두(Vasubandhu, 세친世親)는 부처님에 대해 [아비달마 구사론] 예경문에서 “모든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뿌리 채 없애셨으며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윤회의 수렁에서 건지신, 바른 실상을 보여주신 스승님께 예경하며 아비달마를 설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수반두께서 부처님을 가리켜 “바른 실상을 보여주신 분”이라 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온갖 무지를 그와 정반대가 되는 방편으로 완전히 없애 버리고, 세상의 모든 지혜를 터득하여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갖추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윤회의 세계에서 윤회하는 수많은 중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심으로, 각각의 업과 번뇌 때문에 고통을 받는 중생이 고통의 근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돕는 선한 마음을 무량겁 동안 익히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버려야할 번뇌도 없고, 오직 위없는 지혜를 갖추어 일상적인 진리(속제俗諦)와 뛰어난 진리(진제眞諦)의 바른 실상에 대해 아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비하신 마음으로 오직 중생을 위하겠다는 생각으로 법의 바퀴를 굴리셨기에 “바른 실상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바수반두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께서는 “대자비로 중생을 건지시고 중생이 그릇된 견해를 모두 버릴 수 있도록 정법을 설하신 부처님께 예경하옵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께 예경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의 근원이기에 고통에 빠져있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하고 고민도 하셨습니다.

 

고통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해탈하시기 전에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생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음을 일으키신 것(발보리심)입니다. 그후 다스리지 못한 번뇌들을 차례로 끊어 마침내 ‘붓다’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부처님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중생 역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고통의 원인이 되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⑥ 누구도 고통은 원하지 않는다

무엇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가? 비록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고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그 누구도 마음이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원하지도 않는 고통은 잇달아 생기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것과 버려야할 것에 대한 바른 견해가 없고 뒤집힌 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거듭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통을 행복으로 여기고,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보고, 또 ‘내가 없음’에도 ‘내가 있다’고 여기는 뒤집힌 견해 탓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뒤집힌 견해를 없애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법을 행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께서 “대자비로 중생을 건지시고 중생이 그릇된 견해를 모두 버리도록..” 말씀하신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일으키는 뒤집힌 견해를 없애기 위해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뒤집힌 견해는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이 둘은 기도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명상으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무상(無常) 혹은 고(苦)를 명상한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바로 바른 견해를 통해서 없앨 수 있습니다. 뒤집힌 견해와 정반대가 되는 바른 견해를 가지면 뒤집힌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일컬어, 고통의 근본인 뒤집힌 견해를 없애기 위해, 뒤집히지 않은 견해 즉 바른 실상을 보신 분이라 하신 것입니다. 교주가 뛰어나고 수승하신 분이라는 것을 그분의 생김새나 그분의 좋은 목소리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주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르침을 자신의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이 가르침이 아주 놀라운 것이구나!” “이치에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법을 전파한 교주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주가 말한 법이 그다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은혜로운 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의 말씀을 전부 따라야 할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주의 가르침을 분석해 보고, 그 가르침을 자신의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합당하다면, 그때 교주의 가르침과 교주는 믿을 수 있는 선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⑦ 고귀한 진리, 사성제(四聖諦)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을 굴리실 때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최초로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설하신 이유는, 모두가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지만 원하지 않는 불행과 원하는 행복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행복은 원인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관계없는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존재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조물주의 창조로 인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인연과 조건에 의해 생기는 ‘연기법’에 대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불교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 역시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일상적인 진리(속제俗諦)에 해당합니다.


짧은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고통을 끊고, 영원히 행복하려면 그것에 합당한 원인과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처님의 가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들을 대치법으로 완전히 소멸시킨다면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멸성제滅聖諦)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멸성제 또한 원인과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멸성제를 이루는 씨앗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도성제道聖諦)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사상의 핵심입니다. 내면의 행복과 고통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변화하는 안팎의 그 무엇이든,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기 그 자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사성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상시 우리는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저 언덕으로 가자.’고 독송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연구. 분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분석하는 것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저 언덕으로 가자.’고 할 때에 이 지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의 뿌리가 무엇인지?’ ‘고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는 뒤집힌 견해 중에서도 특히 근본적인 어리석음인 무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뒤집힌 견해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명이 가장 강하며, 뒤집힌 견해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무명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이 뒤집힌 견해인지 아닌지를 논리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을 통해, 어떤 대상을 실상 그대로 본다면 뒤집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존재하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다르게 본다면 뒤집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알 때 본래의 실상대로 알지 못한다면 뒤집힌 것입니다. ‘지혜의 저 언덕으로 가자.’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명을 통해 대상을 보는 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한편, 뒤집힌 견해를 없애려면 뒤집히지 않은 많은 견해 중에도 ‘바른 실상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로 무명을 그 잠재적인 성향(습기習氣)까지 완전히 없애려면 지혜뿐만 아니라 큰 복덕의 도움(자량資糧)도 함께 갖추어야만 합니다.


⑧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一切智)

나가르주나께서 “대자비로 중생을 건지시고..”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처럼, 중생을 도우려는 생각 가운데 가장 수승한 마음인 다른 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보살심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의 힘을 키우면 뒤집힌 견해인 무명의 힘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지혜의 저 언덕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른 실상을 아는 지혜와 복덕자량을 함께 갖춤으로 뒤집힌 견해의 잠재적인 성향을 없앨 수 있으며 그 결과,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윤회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피안으로 가는, 다시 말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지혜임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란 깨달음으로 가는 주체와 깨달음의 저 언덕(피안彼岸)과 깨달음 그 자체를 일컫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깨달음의 길(오도五道: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의 과정을 통해 순서대로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을 지혜바라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선한 마음인 보리심을 방편으로 바른 실상을 아는 지혜를 꾸준히 익혀, 실제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를 ‘지혜의 저 언덕으로 가자.’ 즉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린 뛰어난(승의勝義) 보리심을 이루려고 하는 것을 가리켜 ‘지혜의 저 언덕으로 가자.’고 한 것입니다. 뛰어난 보리심이 생기도록 뛰어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을 ‘지혜의 피안으로 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체지를 이루는 씨앗과도 같습니다. 이를 통해 나중에 일체지를 얻는데, 그것을 ‘지혜의 피안으로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주체와 피안과 깨달음을 이룬 그것을 ‘도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구절 가운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gate gate paaragate paarasa.mgate bodhi svaahaa)’가 있습니다. 지혜와 방편을 통해 피안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봅시다.


‘아제 아제(gate gate)'는 ‘가다’. 또는 ‘갔다.’는 뜻입니다. 건너감을 뜻하는 ‘가자. 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안으로 가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가자. 보리에 완전히 안주하자.’라고 한 것입니다. 피안으로 완전히 간 상태를 ‘갔다. 갔다. 피안으로 완전히 갔다. 깨달음에 완전히 안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안으로 갈 때도 순서에 따라 가는 것이지 한순간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론에서도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자’라는 것은 어느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자’는 의식의 흐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⑨-1 고통은 의식의 흐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의식의 흐름을 다스리지 못해 고통이 생기므로 의식의 흐름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의 흐름에서 거친 것부터 없애기 시작하여 점차 미세한 것까지 없앨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의식의 흐름을 바르게 다스리는 단계로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가자. 보리에 완전히 안주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량도 등의 다섯 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흐름’이라는 것은 의식의 흐름을 의미하며, 의식의 흐름이란 의식의 연속성을 말합니다. 흐름이 있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 흐름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을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허물을 없앨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깥 대상에 있는 순간순간의 흐름을 통해 허물을 없앨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명과 그 잠재적 성향을 소멸시키는 것을 바깥 대상을 통해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핵심은 의식 흐름의 허물을 정화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물을 없앨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 의식의 흐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의식의 흐름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도 의식의 흐름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의식의 흐름이 생겨야 합니다. 이런 바른 의식의 흐름도 있습니다. 싫어하는 멀리 떠나려는 마음(염리심厭離心) 혹은 보리심 같은 새로운 방편에서 의식이 생겨서, 다스리지 못했던 의식의 흐름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 모두 의식의 흐름에 달려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피안으로 가는 것도 의식의 흐름에 달려있다고 알아야할 것이고, 피안으로 갔다고 하는 것 또한 의식의 흐름에 달려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의식의 흐름에는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감각능력(vedana, 수受)이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들 의식의 흐름에도 ‘나’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나’라는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깨어있고 인지하고 느끼는 것 등의 의식의 흐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마음도 생길 수 없습니다.

‘나’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마음 또한 생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나’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를 대상으로 하여 ‘나’라는 마음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지하고 느낄 때 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의식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의식이란 우리가 감각으로 느낄 수 있고, 인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대상을 보고, 느끼고,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막 잠에 들었다거나 잠이 깊이 들지 않았을 때 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스스로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하고 느낍니다. 꿈속에서 행복함과 고통의 느낌을 느끼기도 합니다. 꿈에도 의식의 연속성이 있고, 의식도 있습니다.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들었을 때도 의식의 연속성은 이어집니다.

 

꿈을 꾸지 않다가 갑자기 다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꿈이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반복합니다. 꿈의 연속성이 없다면 그렇게 감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조건이 원인이 되어 꿈을 꾸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꿈을 꾸는 것은 의식의 연속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잠잘 때는 의식은 잠깐 쉬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그 의식의 흐름은 계속 이어집니다. 예로 들어 깊은 잠을 잘 때 비록 꿈을 꾸진 않지만 나중에 꿈을 꾸는 그 연속성은 남아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볼 필요 없이 그건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의식은 그 흐름이 존재합니다.

⑨-2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 것

인간의식은 우리가 삶을 시작한 이래 그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식은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五蘊)를 토대로 하는데 근래에는 뇌의 신경계가 식의 토대가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식의 토대가 있다면 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식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온이 있다고 해서 항상 식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바탕에 대해 쉽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을 오온의 의식 바탕과 내면의식으로 나누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이 있다고 해서 그 의식이 꼭 있는 것도 아닙니다. 뇌의 신경계는 많은 신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각각의 신경 흐름이 나누어져 있다면 의식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즐겁다.’ ‘슬프다.’ 혹은 우리의 몸이 ‘불편하다.’ ‘편하다.’고 느끼는 것조차 의식의 바탕이 정상적일 때는 순조롭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의식바탕들이 고장이 나거나 뇌 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면, 의식은 희미해지고 서서히 다른 의식들이 생길 때 방해(장애障碍)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명백합니다. ‘이것과 이것은 이것이다.’하는 생각과 혹은 그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반드시 신경계에 변화가 생겨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할 때와 아플 때를 비교해 보면, 의식이 뚜렷함과 희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 바탕에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탕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의식이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만으로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뇌신경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근래에 들어 알았습니다. 신경에 변화가 와서 온갖 분별이 생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온갖 분별의 변화 때문에 신경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갖은 분별 또한 신경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오직 각각의 신경이 있음으로 생긴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분별 자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의식에 그 바탕을 두지 않고는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과 의식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식이 변하는 것은 우리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양이 있는 것들, 변하는 그 어떤 것도 그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명백합니다. 예전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의 흐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형상이 있는 것들은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러나 비슷한 종의 유전만이 아닌 이종(異種)끼리도 유전자의 동질성은 대단히 큽니다.     그러므로 미세 원자를 볼 때는 분명히 모든 원자로 동질성을 이루듯이 그 본질의 원자는 인간이나 다른 종들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⑩-1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이라는 종은 몸을 받은 이후에 생긴 것이지만 미세원자는 인간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미세한 의식의 흐름은 이 몸을 받은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몸을 바탕으로 생긴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의 흐름이라는 것도 이 미세의식이 시작함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감지하는 의식의 흐름이 생겨나는 흐름도 있겠지만 그 원자의 흐름으로 보면 이 지구나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이 몸을 받음으로써 생겨났지만 미세의식은 예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의식의 흐름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몸을 새로 받는 순간이 있고, 끝나는 순간도 있습니다만 의식의 흐름에는 그 시작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의식의 흐름에 끝이 있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나’라는 것은 오온을 토대로 붙여진 것이지만, 핵심은 시작 없이 전해져 온 의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오온을 토대로 삼는 의식의 흐름이 시작과 끝이 없이 전해져 온 의식의 흐름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 또한 시작과 끝이 없는 것입니다. 전생과 내생 또한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바라지 않고 행복만을 바라는 ‘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낍니다. 인도에서는 약3000여 년 전부터 이런 ‘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마음이 일어날 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 자체가 곧 ‘나’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몸의 각 부분을 다스리는 ‘나’라는 것이 몸과 마음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몸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 있다 갓난아이로 태어나 성장하여 젊은이가 되고, 차차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언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말을 합니다. 우리가 언제 태어났다고 말할 때, ‘태어난 때’란 사람의 몸을 받아 이생에 태어난 그 순간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태어나는 그 순간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를 인식하는 것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자라 어린 아이가 되고, 어린이가 자라 젊은이가 됩니다. 이처럼 성장하면서 우리 몸은 변하고 달라지지만 ‘나’라는 것은 언제나 같고, 변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한편, 인과법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전생에 지금과는 다른 몸을 갖고 있었으며, 현생에서 죽을 때는 지금의 이 몸을 버리고 내생에 다른 몸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오온’과 다른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나’라는 것이 ‘나의 오온’과 다른, 별개로 달리 존재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온’과 다른 ‘나’가 있어야 하며, 그런 ‘나’는 변하지 않으며, 어느 것에도 묶여있지 않는 항상하고 단일하며, 독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다릅니다. 불교 이외의 사상가(외도外道)의 주장대로 오온에 의지하지 않는 항상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면, 젊었을 때의 ‘나’나 늙었을 때 ‘나’를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하는 외형의 몸은 변하지 않는 ‘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몸이 아픈 뒤 나았다고 합시다. 완쾌한 후, ‘병이 나서 내가 아팠지만 이제 나는 다 나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픈 ‘나’와 나은 ‘나’가 외도들이 말하는 영원한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이 비록 육신을 이끄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나’ 역시 결국 오온에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몸에 의지하지 않는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⑩-2 그러면 이 ‘온’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인가?

‘오온五蘊’이라는 것은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관계를 가진 후에 생기는 아이의 ‘오온’은 ‘거친 오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갖기 전부터 존재하는 ‘의식의 연속성’은 아주 미세한 ‘오온’에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라는 것을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오온’도 그렇습니다. ‘나’라는 것을 둘로 나누는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데 있어, 의지해야 하는 ‘오온’을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시광명(死時光明)* 순간의 ‘나’를 미세한 ‘나’로 보면 됩니다. 그때 ‘거친 오온’은 모두 사라지지만 ‘미세한 오온’은 남아있습니다. ‘나’라는 것은 ‘오온’에 의지하여 존재하며, 오온과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같이 보시고 무아(無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외도는 ‘오온’에 의지하지 않는 자유로운 ‘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나’를 항상하고, 단일하며 독립적인 것이라고 봄으로써 사람으로서 자아(인아人我)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을 바라지 않고 행복만을 바라는 ‘나’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다른 학파의 주장과 같습니다. 하지만 불교 교리에서 주장하는 ‘나’에는 ‘오온’에 의지하지 않는 인아(人我)는 없습니다. 상키야학파와 같은 인도의 사상가들이 ‘오온’에 의지하지 않은 독립적이고 단일한 ‘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불교에서는 ‘오온’에 의지하지 않은 인아는 없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것이 ‘오온’에 의지해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불교 내에서도 ‘오온’에 의지한 ‘나’에 대한 설명의 차이로 많은 학파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마음에 ‘나’라는 생각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 ‘나’와 ‘나의 것’-나의 몸. 나의 친척. 나의 재물 등-으로 여기는 생각이 생김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 장애가 되는 것은 다른 편(남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에 ‘나’라는 것이 생기면서 ‘나의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나의 것’에 애착을 하면서 ‘나의 것’은 소중하고 ‘남의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뿌리는 ‘나’라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뒤집힌 견해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뒤집힌 견해는 ‘나’라는 마음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마음에 ‘나’라는 것이 원래 있기는 하지만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뒤집힌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애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나’라고 집착하는 아집과 유신견(有身見)*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것’이라는 유신견이 생기면서 삼독과 같은 번뇌가 생깁니다. ‘나’라고 집착하는 유신견은 무엇인가? 이것은 뒤집힌 견해 가운데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키야학파와 같은 외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게 오온에 의지하지 않는 ‘또 다른 나’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나’라고 하는 유신견을 더 강화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에 의지하지 않는 ‘나’는 없을뿐더러 오온을 다스리는 ‘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의 견해’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무아의 견해’로 ‘나’라고 집착하는 아집의 힘을 점차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불교에서는 ‘오온’을 다스리는 또 다른 독립적인 ‘나’는 없으며, 이것을 아는 견해가 ‘영원히 존재하는 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영원히 내가 있다는 것’과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유신견이라 합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뒤집힌 견해가 어떤 것인가 관찰하고, 이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고 집착하고, 독립적인 ‘나’가 있다고 하는 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면 아집과 유신견이 뒤집힌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뒤집힌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사성제의 핵심은 행복과 고통을 포함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기’ 즉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연기를 설하시고자 사성제에 대해 설하신 겁니다. 불교사상의 뿌리는 연기사상입니다. 사성제의 멸성제를 통해 고통의 원인을 버릴 수 있으며, 고통의 원인인 뿌리까지도 차례로 없앨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뒤집힌 견해 중에서도 무명은 끊임없이 윤회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 가운데 첫 번째로 무명을 설하셨습니다. 무명 같은, 뒤집힌 견해에서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므로 고통을 없앨 수 있는지, 없는지는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시광명(死時光明)

티베트 [사자의 서] 등에서도 설명하듯이 사람의 생명이 다했을 때 안?이?비?설?신의 여섯 감각이 정지되어 무너지며, 아집의 제7식인 말나식도 사라지지만 제8식 알리야식은 빛의 형태로 남아있어 다음 생을 윤회하는 근원이 된다. 따라서 이 제8식이 죽을 때 빛의 형태로 남아있으므로 ‘죽을 때의 빛’이라고 한다.


*유신견(有身見)

산스크리트어 satk?yadrsti, 팔리어 sakk?yaditthi 다섯 무더기(오온五蘊)가 ‘영원한 자아’와 관계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불변하는 자아라고 집착하는 견해. 다섯 무더기가 자아와 동일하다는 견해 5가지, 자아가 다섯 무더기라고 하는 견해 5가지, 다섯 무더기 안에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 5가지, 자아 속에 다섯 무더기가 존재하는 견해 5가지로 모두 20가지의 견해가 있다.

⑪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한국 법우들의 경우, 대부분 부모님 때부터 불자였을 것입니다. 우리 티베트인 역시 부모님 때부터 불자였습니다. 조상 때부터 믿어온 종교에 대해 잘 알고, 타당한 이유와 바람으로 신심을 낸다면,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까닭 또한 타당할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믿어온 불교의 장점을 논리적으로 내세워 다른 종교를 멸시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자체의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종교로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천주교 등이 있습니다. 이런 종교들의 경우, 사상과 철학이 있기 때문에 가르침 또한 깊습니다. 이런 종교를 믿는 신도는 몇 천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 종교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현재에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래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누구든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거론한 종교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이루게 할 수는 없지만 일시적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인과법을 믿지 않더라도 각 종교의 가르침대로 잘 행한다면 아마도 내생에는 천사 혹은 인간의 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종교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로운 것이기에 더욱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양한 종교는 각각의 사상과 철학과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각 종교의 사상과 철학이 다른 이유는 개개인의 성향과 바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각 다른 성향과 바람을 가진 인간들은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불교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은혜로운 부처님의 제자이면서도 각자의 성향과 바람 그리고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각각 다른 사상과 철학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식학파와 중관학파의 사상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두 학파의 견해는 아주 다릅니다.  유식학파의 사상을 중관학파 입장에서 보면, 정반대가 되는 점들이 아주 많습니다. 중관학파 입장에서 보면 유식학파가 외부의 대상(외경外境)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단견(斷見)인 것입니다. 유식학파는 마음을 ‘실재하는 것(실유實有)’으로 봅니다. 이를 중관학파에서는 상견(常見)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관학파 입장에서 보면 유식학파의 주장은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라 그릇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식사상을 말씀하신 분도 부처님이십니다.


⑫ 부처님의 가르침도 분석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중생의 성향과 바람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 내에서도 각각 다른 학파가 있듯이, 이 지구상에 다양한 사상과 철학이 존재하는 것은 중생의 성향과 바람 그리고 근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상과 철학이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으며, 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식사상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중관사상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 둘 다 소중한 것이라 여겨, 유식사상도 믿고 따르고 중관사상도 믿고 따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귀의합니다.”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유식사상에서는 마음이 ‘실재하는 것(실유實有)’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스스로 믿고 인정한다면, 중관사상에서 말하는 마음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어있는 것(제법개공諸法皆空)’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본디 실체가 없이 비어있음을 주장하는 중관사상에서 마음이 본디 실재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유식사상을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조차 꺼낼 수 없습니다.


서로 존중할 수는 있지만, 서로 다른 사상에 대해 옳음을 인정하고, 믿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로 불교에서는 연기사상 즉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결과가 발생하는 연기법에 대해 생각하고, 번뇌가 고통의 뿌리라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닫는 지혜가 생기고, 이를 통해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인 ‘해탈’이 옳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아마도 다른 종교를 믿고 따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알면서도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연기사상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조물주나 창조주가 있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번뇌의 뿌리는 아집으로 뒤집힌 견해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유신견의 허물을 버리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상키야학파와 같이 독립적인 ‘나’가 있다고 인정하는 종교를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나’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를 존중해야 하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한 사람이 동시에 믿고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보통 잘 관찰하지 않고 타성에 젖어, 각 종교의 가르침이나 창시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부처님이 아주 소중한 분이듯이 그리스도. 모하메드 또한 매우 소중한 분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종교를 만든 창시자들이 있습니다. 모두 아주 소중하고 훌륭한 분입니다. 그래서 모두 존경해야 합니다.


존경할만한 분이라고 해서 그분들의 가르침 모두 믿고 따르는 것은 아주 근기가 낮은 사람이 하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 보지 않고, 관찰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써 법을 제대로 알고, 슬기롭게 잘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맹목적으로 모든 종교를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한 길만 보고 열심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 예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둘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두 가지 모두 존중해야 하지만 자신의 성향이나 근기가 유식사상에 더 적합할 것 같으면 이를 믿고, 중관학파의 사상은 다른 한 쪽에 두십시오. 반면 중관사상이 더 적합하고 믿고 따를만한 것이라면 유식사상은 다른 쪽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부처님의 법 즉 불교가 더 맞는 것 같으면 불교를 믿고 따르고 다른 종교를 다른 한 편에 두십시오. 그렇지만 그 종교들을 존중하십시오. 인도에서 부처님께서 오셨을 당시에 상키야학파와 같은 외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들의 사상을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셨습니다. 사성제와 같은 법륜을 굴리실 때 외도의 가르침에 있는 가르침들을 설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외로 지관법(止觀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은 불교와 외도의 공통적인 수행법입니다. 무상. 보시. 지계. 인욕.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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